텍사스홀덤에서 칩 보유량을 스택이라고 한다.
홀덤은 스택에 따라 전략이 극단적으로 달라진다. 같은 카드를 받아도 칩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게임을 하게 된다. 인생을 홀덤에 비유하자면, 잃을 게 많은 사람과 잃을 게 없는 사람의 태도 차이가 될 것이다.
토너먼트의 칩 단위는 BB다. 보통 20BB 이하를 숏스택, 100BB 이상을 딥스택이라 부른다. 참가자는 바이인 비용을 내고 들어와 특정 순위 안에 들어야 상금을 받는다. 그 안에 들지 못하면 단 한 푼도 챙기지 못한다. 2등도 아니고 0이다.
딥스택 플레이어는 베팅에 참여하는 범위가 넓다. 작은 칩을 던져 상대의 반응을 사고, 아니다 싶으면 접는다. 정보를 사는 데 돈을 쓸 수 있고, 틀려도 다음 판이 있다. 여유가 있다는 건 그런 것이다. 판단을 유예할 수 있는 권리.
숏스택은 그럴 수 없다. 블라인드가 스택을 갉아먹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. 그래서 전략이 단순해진다. 올인 아니면 폴드. 지루하게 접다가, 한 번에 전부를 건다. 이건 무모함이 아니라 수학이다. 숏스택에게는 그게 최선이다.
나는 숏스택으로 사회에 나왔다.
가진 게 없었고, 그래서 잃을 것도 없었다. 그 시절 나의 충동성은 명백한 강점이었다. 남들이 정보를 더 모으는 동안 나는 이미 칩을 밀어넣고 있었다. 재고 따지느라 못 잡는 판을 나는 잡았다. 무모해서가 아니라, 숏스택에게는 그게 최적 전략이었기 때문이다. 실제로 그 플레이로 몇 판을 이겼다. 그래서 나는 그게 내 실력인 줄 알았다.
스택이 늘어난 뒤에도 나는 같은 플레이를 했다.
접고, 관찰하고, 기다리는 시간을 견디지 못했다. 작은 베팅으로 정보를 사는 그 지루한 과정이 나에게는 고문이었다. 그래서 판을 키웠다. 이길 것 같아서가 아니라,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참을 수 없어서.
돌이켜보면 나는 이기려고 올인한 게 아니었다. 카드가 뒤집히기 직전의 그 몇 초, 심장이 뛰는 그 순간에 중독되어 있었다. 결과는 부차적이었다. 이겨도 곧바로 다음 올인을 찾았으니까.
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의 변화를 일으킨 사건들이 있다. 여기에 다 적을 수 없는, 말 못할 사정들. 그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.
나는 스스로를 경험으로 깨우쳐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. 남의 말로는 안 되고 직접 데어봐야 아는 유형이라고.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. 나는 경험해도 배우지 못하는 상태였다. 데이고, 알고, 그러고도 똑같이 행동하는. 배움이 무력해지는 지점이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.
하루라도 빨리 인지했다면 나았을까. SNS에서나 보던 사연들이 왜 나에게 몰아쳤을까. 왜 나는 그걸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고 믿었을까.
포커에는 틸트(tilt)라는 말이 있다. 크게 잃거나 억울한 패배를 당한 뒤, 감정에 휩싸여 평소의 판단력을 잃어버리는 상태를 말한다. 틸트에 걸린 플레이어는 잃은 걸 당장 되찾으려고 더 무리한 베팅을 한다. 그리고 대부분 그 판에서 완전히 무너진다. 무서운 건 본인은 자기가 틸트라는 걸 모른다는 점이다. 그냥 오늘 운이 없었다고 생각한다.
지금 나는 틸트 상태인 것 같다.
강점이라 믿었던 것이 너무 큰 역풍이 되어 돌아왔고, 나는 그걸 만회하려고 한동안 더 크게 밀어넣었다. 그게 틸트라는 걸 인정하는 데 오래 걸렸다.
지금은 여러 가지 치료를 병행하고 있다. 치료가 하는 일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게 아니다. 올인 버튼과 내 손 사이에 아주 얇은 간격을 만들어줄 뿐이다. 그 간격 안에서 한 번 생각할 수 있게.
효과가 도는 시간에는 괜찮다. 어려운 건 그 밖의 시간들이다. 효과가 벗어난 시간에 예상을 벗어난 행위가 나온다. 그래서 요즘은 그 구간에 브레이크를 거는 연습을 한다. 중요한 결정을 그 시간에 하지 않기. 결제를 미루기. 보내려던 메시지를 하룻밤 재우기.
틸트에 걸렸을 때 프로들이 하는 일은 정해져 있다.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. 지금의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중이다.
숏스택 전략이 나쁜 게 아니다. 숏스택일 때는 그게 옳다. 다만 나는 내 스택을 잘못 세고 있었다. 아직 잃을 게 남아 있는 사람이, 잃을 게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.
나는 다음 토너먼트에서 딥스택을 운영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고자 한다.
기다릴 줄 알면서 리스크도 감수할 줄 아는 상태로. 이 둘은 반대말이 아니다. 오래 기다릴 수 있는 사람만이 제대로 된 순간에 크게 걸 수 있다. 아무 때나 거는 건 리스크 테이킹이 아니라 그냥 못 참는 것이다.
혹시 지금 판을 키우고 싶은 충동이 든다면, 한 번만 물어봐 주었으면 한다. 정말 이길 것 같아서인지, 아니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견딜 수 없어서인지.